[김창엽 기자의 엄빠일기] "삼촌, 나는 열개 얼굴 가진 여자야"
"삼촌 요즘 개스 값 비싸지. 내가 개스 좀 보태줄께." 어느 날 아침 등교를 위해 차고에 들어서자 갑자기 햄달새가 자동차 주유구 쪽으로 바싹 다가서더니 방귀를 날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틈만 나면 장난치려드는 10살 소녀 햄달새의 말 재주는 나의 예상을 넘어설 때가 많았다. 엄밀히 말하면 말 재주라기 보다는 아마도 요즘 아이들 특유의 영악함에서 비롯되는 현란한 언사가 나를 깜짝 깜짝 놀라게 하곤 했다. "그래 너네 엄마 분당 갔다고. 사실 너네 엄마도 어쩔 수 없지. 나이가 나이인데 보톡스를 맞아줘야지." 한 번은 서울의 제 언니와 통화하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였다. 옆에서 흘려 듣자 하니 '너네 엄마'라는 건 사실 자기 엄마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햄달새가 자기 친언니와 대화를 나누면서 제 엄마를 마치 동네 친구 아줌마 정도로 가정하고 수다를 떠는 데 속으로 살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틈만 나면 사람을 졸라대고 필요할 때는 어리광도 마다 하지 않는 어린 아이 입에서 나올 것으로 기대되는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야 너 지금 너네 엄마 말하는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그리고 네 엄마 분당갔다고 꼭 보톡스 맞으라는 법 있어?" 전화 통화를 끝낸 햄달새에게 내가 이렇게 물으니 살짝 콧방귀를 뀌듯 거침없이 대답했다. "뻔한거야 삼촌. 엄마가 일요일 날 분당가면 뭐 할게 있다고 전에도 그랬어." 햄달새는 뭘 그런 걸 시비를 삼느냐는 시큰둥하게 말을 맺었다. 요즘 아이들은 매스 미디어에 과다하게 노출 된 탓인지 아니면 가정 교육이 불충분한지 종종 어른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말과 행동을 자주 하는 것 같다. 햄달새가 특이할 수도 있지만 어린 조카나 친인척 아이들을 자주 접해 본 내 친구들도 나와 비슷한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는 얘기들을 많이 했다. 우스개 소리로 요즘 아이들은 생일 한 달 차이에서도 세대 차이를 느낀다지만 막상 귀로 듣고 눈으로 보니 한편으로는 걱정이 됐다. 햄달새와 10살 남짓 연령차가 있는 내 아이들은 햄달새만한 나이에 전혀 어른 흉내를 내지 않았다. 개인적인 천성의 차이도 있겠지만 시대의 변화상도 일정 부분 아이들 말버릇과 정서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다른 건 몰라도 내 눈에는 시건방진 햄달새의 태도는 확실히 미국의 동급생들과는 사뭇 다른 거였다. 과거 내 아이들이 어린 나이에 미국에서 자랄 때를 돌이켜 보면 미국 아이들은 대체로 육체적인 성장은 빨라도 어른 같은 사고는 하지 않는 편이었다. 좋게 말하면 미국 애들은 순박했고 단순했다. 그럼에도 햄달새가 동급생들과 큰 무리없이 지내는 것이 신기했다. 미국에 와서 거의 한 학기를 다 보내고 여름 방학이 가까워 오는데도 학교 생활에서 어떤 트러블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 교실에서 보면 네 미국 친구들 너무 착하지 않니 특히 네 눈에는 그럴 것 같은데." "나도 알아 삼촌. 내가 학교에서는 다 맞춰서 살지. 삼촌은 나를 아직도 그렇게 몰라? 내가 10개의 얼굴을 가진 여자야." 어린 아이치고 임기응변이 탁월하다는 점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제 입으로 10개의 얼굴 가진 여자라고 말하는데 또 한번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