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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엽 기자의 엄빠일기] "삼촌, 나는 열개 얼굴 가진 여자야"

"삼촌 요즘 개스 값 비싸지. 내가 개스 좀 보태줄께." 어느 날 아침 등교를 위해 차고에 들어서자 갑자기 햄달새가 자동차 주유구 쪽으로 바싹 다가서더니 방귀를 날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틈만 나면 장난치려드는 10살 소녀 햄달새의 말 재주는 나의 예상을 넘어설 때가 많았다. 엄밀히 말하면 말 재주라기 보다는 아마도 요즘 아이들 특유의 영악함에서 비롯되는 현란한 언사가 나를 깜짝 깜짝 놀라게 하곤 했다. "그래 너네 엄마 분당 갔다고. 사실 너네 엄마도 어쩔 수 없지. 나이가 나이인데 보톡스를 맞아줘야지." 한 번은 서울의 제 언니와 통화하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였다. 옆에서 흘려 듣자 하니 '너네 엄마'라는 건 사실 자기 엄마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햄달새가 자기 친언니와 대화를 나누면서 제 엄마를 마치 동네 친구 아줌마 정도로 가정하고 수다를 떠는 데 속으로 살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틈만 나면 사람을 졸라대고 필요할 때는 어리광도 마다 하지 않는 어린 아이 입에서 나올 것으로 기대되는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야 너 지금 너네 엄마 말하는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그리고 네 엄마 분당갔다고 꼭 보톡스 맞으라는 법 있어?" 전화 통화를 끝낸 햄달새에게 내가 이렇게 물으니 살짝 콧방귀를 뀌듯 거침없이 대답했다. "뻔한거야 삼촌. 엄마가 일요일 날 분당가면 뭐 할게 있다고 전에도 그랬어." 햄달새는 뭘 그런 걸 시비를 삼느냐는 시큰둥하게 말을 맺었다. 요즘 아이들은 매스 미디어에 과다하게 노출 된 탓인지 아니면 가정 교육이 불충분한지 종종 어른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말과 행동을 자주 하는 것 같다. 햄달새가 특이할 수도 있지만 어린 조카나 친인척 아이들을 자주 접해 본 내 친구들도 나와 비슷한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는 얘기들을 많이 했다. 우스개 소리로 요즘 아이들은 생일 한 달 차이에서도 세대 차이를 느낀다지만 막상 귀로 듣고 눈으로 보니 한편으로는 걱정이 됐다. 햄달새와 10살 남짓 연령차가 있는 내 아이들은 햄달새만한 나이에 전혀 어른 흉내를 내지 않았다. 개인적인 천성의 차이도 있겠지만 시대의 변화상도 일정 부분 아이들 말버릇과 정서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다른 건 몰라도 내 눈에는 시건방진 햄달새의 태도는 확실히 미국의 동급생들과는 사뭇 다른 거였다. 과거 내 아이들이 어린 나이에 미국에서 자랄 때를 돌이켜 보면 미국 아이들은 대체로 육체적인 성장은 빨라도 어른 같은 사고는 하지 않는 편이었다. 좋게 말하면 미국 애들은 순박했고 단순했다. 그럼에도 햄달새가 동급생들과 큰 무리없이 지내는 것이 신기했다. 미국에 와서 거의 한 학기를 다 보내고 여름 방학이 가까워 오는데도 학교 생활에서 어떤 트러블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 교실에서 보면 네 미국 친구들 너무 착하지 않니 특히 네 눈에는 그럴 것 같은데." "나도 알아 삼촌. 내가 학교에서는 다 맞춰서 살지. 삼촌은 나를 아직도 그렇게 몰라? 내가 10개의 얼굴을 가진 여자야." 어린 아이치고 임기응변이 탁월하다는 점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제 입으로 10개의 얼굴 가진 여자라고 말하는데 또 한번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11-05-26

[김창엽 기자의 엄빠일기] 혼자 자동차 문틀에 머리 찧기도

20대 초반에 군대 생활을 3년 가까이 했다.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그 기간 동안 후배 병사들에게 딱 3번 주먹을 날렸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3사람에게 각각 1대씩 총 3대를 때렸다. 내 자신은 선배들로부터 그보다 서너 배쯤은 더 맞은 것 같다. 학창 시절 주먹다짐을 꽤나 많이 한 편이지만 자식을 키우면서 물리적 폭력은 그다지 자주 행사하지 않았다. 내 자식들을 상대로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에 작심하고 매를 들었던 것은 딸과 아들에 대해 각각 한 차례였던 것 같다. 특히 지금도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는 것은 초등학교 1학년이던 아들을 놀이용 하키 채로 두들겨 팼을 때였다. 친구들과 어울려 여자 동급생을 못되게 놀렸다는 사실을 알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방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 매 타작을 시작했다. 아들을 엎드려 뻗치게 한 뒤 두툼한 하키 채가 거의 부러질 때까지 아들의 엉덩이를 팼다. 그리고 나서 아들을 무릎 꿇게 한 뒤 같은 하키 채로 내가 내 종아리를 피가 튀길 때까지 때렸다. 안방에서 훈육이라는 명목 아래 이런 '폭력 사태'가 벌어지는 동안 밖에서는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아이 엄마 이렇게 셋이 사정없이 방문을 두들기며 호소를 쏟아내고 있었다. "아범아 이제 그만 둬라" "여보 이제 됐잖아요" "당장 문 열어라"며 울부짖다시피 했다. 그 후로는 아이들의 몸에 손을 댄 적은 없는 것 같다. 딸과 아들은 각각 한국에서 초등학교 6학년 4학년 때 미국으로 왔다가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돌아갔는데 그 사이 육체적 폭력은 전혀 행사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내 스스로 반성도 있었지만 남의 나라 땅에서 엄마도 없이 사는 애들을 때린다는 게 인정상 내키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그러니 나이 오십 줄에 맡아 기르기 시작한 여자 조카 아이 햄달새에게 손을 댈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매를 대지 않기로 사전에 결심한 게 아니라 회초리는 애초부터 아예 양육 옵션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햄달새가 여간 해서는 혼낼 일이 없는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란 뜻은 아니다. 엄마 아빠와 함께 제 집에서 자랄 때 종종 매를 버는 짓도 하는 그 나이 평균 정도의 아이라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어쨌든 햄달새는 그 나이 내 자식들보다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조금 더 많이 했다. 한치 건너 두 치라고 팔이 안으로 굽기 때문에 햄달새의 잘못이 눈에 더 자주 들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여러 주변 상황들이 햄달새로 하여금 모범생활을 가능하게 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미국이라는 관습이나 행동 요령 등이 익숙하지 않은 나라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것도 그런 요인일 것이다. 게다가 나와는 영 딴판인 양육 철학을 갖고 있는 저희 엄마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햄달새 입장에서는 할배 삼촌의 양육 방식에 적응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 이런 여건 때문에 햄달새를 키우면서 성질 급한 나로서는 어떤 날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가슴을 치고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 불쑥불쑥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실제로 화를 억누르지 못해 예를 들어 혼자서 자동차 문틀에 머리를 몇 차례 찧는 일도 있었다. 헌데 다행인지 또래에 비해 상황 판단력이 남다른 햄달새는 할배 삼촌의 머리 꼭대기에서 앉아있다는 듯 내가 속에서 열불이 날 때면 그때그때마다 적절히 대처하며 삼촌과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지 않게 하는 재주를 보였다.

2011-05-19

[김창엽 기자의 엄빠일기] "일체 수고비 받지 않길 정말 잘했다"

"오빠 그래도 돈을 주고 싶은데…. 너무 미안하잖아." "됐다. 돈은 무슨 돈 나는 네 딸 봐주면서 돈은 죽어도 못 받는다. 다시는 돈의 돈자도 입밖에 내지 마라." 동생은 햄달새를 내겐 맡긴지 얼마 되지 않아 돈 얘기를 꺼냈다. 동생은 아무리 오빠라지만 맨 입으로 자기 딸을 키워달라는 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양육 비용을 받지 않으려면 하다 못해 매일 저녁 때 내가 1시간씩 하는 수학 과외에 대해서 만큼이라도 사례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깊게 생각하고 말 것도 없었다. 돈을 받는 그 순간부터 오빠와 여동생 혹은 외삼촌과 조카라는 가족 관계에 커다란 장벽 같은 게 우뚝하니 들어설 것 같았다. 몸이 불편한 건 참을 수 있어도 마음이 불편한 건 참기 힘들다. 누가 마음 불편한 일을 자청하겠는가. 본능적으로 이른바 일체의 수고비는 받지 못하겠다고 했다. 이로써 동생이 햄달새를 조기유학 시키는데 따른 부담은 상대적으로 그리 크지 않게 됐다. 햄달새가 다니는 사립학교의 등록금 등 학비 중국어와 바이올린 등의 과외비 그리고 가족이 늘면서 발생된 추가 생활비가 동생 몫으로 확정됐다. 추가 생활비는 자존심이 상해 받지 않으려 했지만 내 벌이에 여유가 없어 빚을 얻어야 할 판이었므로 동생한테 청구하기로 했다. 햄달새가 오면서 방 1개를 더 늘려 이사해야 하는 바람에 늘어난 아파트 렌트 비용과 자동차 기름값 등이 그 것이었다. 사실 햄달새 학교 픽업과 라이드 그리고 이 곳 저 곳으로 과외를 다니는데 한 달에 자동차로 1500마일 이상을 뛰어야 하므로 휘발유 값도 작은 돈은 아니었다. 햄달새 양육에 따른 돈 문제는 어쨌든 조기 유학을 시작하자마자 깨끗하게 정리됐다. 동생이나 나나 직선적인 성격상으로도 더 이상 신경 쓰거나 불만의 소지가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동생은 형편이 그다지 어려운 편이 아니므로 불시에 생각지도 못한 돈이 들어가게 된다면 나로서는 그때그때 소요에 따라 청구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햄달새를 맡아 기른 지 두어 달이 지나면서 역설적으로 '돈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돈을 받지 않길 정말로 잘했다"는 생각이 어떤 때는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 들었다. 햄달새를 키운 지 대략 세달 째에 접어들던 어느 날 전자우편으로 동생에게 각종 경비 지출 내역을 전하면서 "돈을 받아가면서는 정말 못할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을 얼핏 내비쳤다. 일종의 푸념일 수도 있었다. 평생 처음 해보는 남의 자식 맡아 기르는 일의 무게감이 견디기 힘들게 느껴졌다. 내 자식 남의 자식 사람을 차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걸 장애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남의 자식과 내 자식이 생리적으로 잘 차별이 안 되는 부류에 속한다. 나의 어머니가 딱 그런 사람인데 나는 그런 점에서 어머니를 확실히 닮았다고들 식구들은 말한다. 내 자식 키울 때와 똑같은 방식 똑같은 정신 자세로 접근하는데도 불구하고 무게감이 확연히 다르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 자식들과 햄달새의 성격 차이 같은 것도 물론 한 이유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무게감의 차이는 키우는 아이들의 성격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기 보다는 내가 햄달새의 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아이 양육에 관한 내 주관은 나름 뚜렷하다. 아니 뚜렷하다 못해 아이들의 기를 질리게 할 만큼 똑 부러진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내 자식이 아닌 조카에게 내 양육 방식을 적용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친부모가 아니면 본질적으로 책임질 수 없는 일을 책임져야 하는 게 그 무게감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2011-05-12

[김창엽 기자의 엄빠일기] 자녀 성공 스펙 쌓기와 성형하기

서울에서 살 때 직장 동료며 학교 친구들이 아이들 과외에 엄청난 돈을 지출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하고는 직접 관계가 없는 일이니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문대에 입학하지 않으면 자식 농사 망친 것처럼 얘기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에게만은 꼭 적어도 한번씩 이런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오로지 명문대 진학만을 위해 쌍심지 켜고 하는 과외는 탐욕이다. 고향친구인 A와 B 두 사람이 있다. 같이 서울로 올라와 대학을 다니고 비슷한 나이에 결혼도 해서 잦은 내왕을 하고 A와 B의 가족들까지도 서로 친구가 됐다. 한데 A는 직장이 시원찮아 돈을 제대로 못 벌고 B는 일이 잘 풀려 경제적으로 걱정 없이 살게 됐다. 흥미로운 점은 A의 자녀들이 B의 자녀들보다 대체로 인성도 머리도 좋은데 부모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B 또한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B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흐흐흐 A야 네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 보다 여러모로 뛰어나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든 과외로 우리 애들을 잡아 명문대학만 보내면 우리 사회에서 네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을 따라 잡기는 쉽지 않을 거야 영영.'" 나한테 이런 면박성 얘기를 듣는 사람들은 대체로 B같은 인물이거나 혹은 B처럼 아이들을 키우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한데 이런 나의 주장을 접한 사람들 가운데 몇쯤은 화를 낼 법도 한데 한번도 반박다운 반박이나 대꾸를 듣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B같은 부류들은 한결같이 영리하고 자신이 왜 아이들을 과외로 내모는지를 스스로 누구보다 잘 아는 부류들이었다. 미국에서는 이른바 서울 공화국 같은 과외 풍토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몇몇 아시아 국가 출신들에겐 얘기가 좀 다르다. 최근 미국 전국적으로 화제가 된 중국계 여성 에이미 추아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예일대 교수인 추아씨는 '호랑이 엄마' 교육 방식으로 자녀들을 '스스로 생각하기에' 성공적으로 키워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추아씨는 최근 발간된 저서에서 자녀를 쥐어 패서라도 일류 명문대에 진학시키려는 의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녀는 자녀들이 아주 어린 나이였을 때부터 숨막힐 듯 빡빡한 과외 일정으로 내몰았다. 추아씨는 자녀의 성공을 위해 그렇게 교육시켰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건 끝 간데 없는 탐욕의 다른 표현방식일 뿐이다. 최소 두 가지 점에서 그녀는 옳지 못했다. 하나는 잔인한 것이고 또 하나는 공정한 경쟁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돈과 명예로 상징되는 사회적 출세를 위해 설령 그것이 내 자식이라도 과도하게 육체와 정신을 지배했다면 잔악한 것이다. 또 상식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시간과 노력이 아니라 남보다 월등히 많은 자원을 투입해 예를 들어 경쟁 상대인 다른 학생들을 제쳤다면 그건 공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거창하게 본다면 적성대로 능력대로 풀어야 할 사회적 인적 자원 배분 문제를 왜곡하는 행위이다. 자녀의 성공 스펙 쌓기는 자칫하면 성형 미인 만들기가 될 수 있다. 성형을 하면 얼굴이나 몸이 예뻐질 수 있지만 고유한 아름다움이나 가치는 사라질 수 있다. 더구나 성형은 유전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는 다 제 자신의 몸에 맞는 옷이 있기 마련이다. 원래 얼굴이 아닌 다른 얼굴을 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평생에 걸쳐 불편한 마음을 유발할 수 있다. 햄달새가 미국에서 하는 과외가 서울에 비해 양적으로 훨씬 적다는 동생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동생의 속마음이 성형 미인을 만들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은 떨쳐낼 수가 없었다.

2011-04-28

[김창엽 기자의 엄빠일기] 과외 안하면 나쁜 일이라도 생기나

"아버지 여기 생활은 절간 같아요." 약 10년 전 LA 교외에 살 때 아들은 어쩌다 한번씩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아들은 당시 현재 조카 햄달새보다 한 살 많은 6학년이었다. 어렸던 아들이 당시 미국 생활을 절간에 비유했던 것은 하루하루가 무척 따분했기 때문이었다. 아들은 미국 생활 초기 여름 방학을 이용해 잠시 출국 경기도의 한 절에서 정신 수련을 한 적이 있었다. 정신 수련의 일환으로 아들은 그때 1만 배를 해서 잠시 주변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힘들었던 1만 배를 빼고는 절간 생활은 심심 그 자체였다고 아들은 몇 번이고 되뇌었다. 하루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몸이 근질거려 고통스러워할 정도의 아이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반면 학교 반 과외 반으로 하루 해가 저무는 햄달새의 미국 생활은 서울을 LA에 옮겨다 놓은 것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 햄달새 엄마는 서울에 비하면 LA 생활이 식은 죽 먹기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허덕이지 않으면 일정을 따라가기가 만만치 않았다. 10여 년 전 우리 딸과 아들이 생 홀아비였던 내 밑에서 자랄 때 기상 시간은 오전 7시쯤이었다. 잠드는 시간은 대체로 밤 11시 전후였다. 기상과 취침 시간은 지금의 햄달새와 비슷하지만 깨어 있는 시간 생활은 천지차이로 달랐다. 당시 딸과 아들은 집에서 100야드쯤 떨어진 학교까지 걸어서 등교했다. 점심은 가끔은 내가 싸주기도 했지만 보통 학교에서 사먹었다. 그리고선 오후 2시 30분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내가 퇴근하는 오후 8시경까지 제멋대로 노는 거였다. 대략 6시간 가까이 되는 자유 시간 동안 나는 매일 우리 애들이 뭘 하면서 보내는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숙제도 하고 심심하면 동네 공원으로 놀러도 가고 했을 것이다. 당시 우리 아이들과 나의 거주지는 전형적인 중산층 베드타운이었다. 반듯한 집과 깨끗한 거리 널찍널찍하고 정돈된 공원 말고는 사람이 돌아다니는 걸 자주 보기도 어려운 동네였다. 아들 말로는 음료수라도 한 병 사서 마시려면 자전거를 타고 왕복 30분은 달려야 한다는 거였다. 더구나 나중에 학교에서 수 차례 선생님들로부터 전화가 와서 파악한 사실이었지만 아들은 일체 숙제를 하지 않는 학생이었다. 나한테 크게 여러 차례 혼나고도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숙제를 하지 않는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니 오후에서 저녁까지 시간이 얼마나 무료했겠는가. 아들보다 2살 위인 딸은 그나마 친구가 많은 편이어서 덜 심심했던 것 같다. 가끔씩 친구 부모들의 차를 얻어 타고 친구 집에도 놀러 갔다 오겠노라고 회사로 전화 연락이 오곤 했다. 아들이 심심해 죽겠다고 하지만 학과목 과외 같은 걸 시켜줄 생각은 아예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대신 운동을 미치게 좋아하는 아이라 농구와 테니스를 시키려 애를 써봤는데 태워다 주고 태워 올 사람을 찾지 못해 그도 쉽지 않았다. 요행히 1주일에 한번은 집 앞의 테니스 코트에서 또 한번은 집에서 차로 15분쯤 걸리는 테니스 아카데미에서 레슨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카데미 레슨은 부정기적으로 아들을 태워주곤 했던 동네 형쯤 되는 미국 아이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냥 쉬어야 했다. 과거에 이랬던 내가 조카를 데리고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학교가 파하기 무섭게 과외 장소로 실어다 주고 오는 일을 반복하게 됐으니 참 사람팔자란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과외를 하지 않으면 아이의 장래에 무슨 큰 나쁜 일이라도 생기는 것일까. 왜 이렇게 죽자고 과외를 시켜야 하는지 매일 한달 두 달 이 짓을 반복하다 보니 은근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2011-04-21

[김창엽 기자의 엄빠일기] '과외 총량 불변의 법칙'

매일 저녁 수학 월요일=바이올린 화요일=테니스 수요일=중국어 목요일=테니스 토요일=성당. 미국에 온지 한 달도 안돼 과외 종목이 확정됨으로써 햄달새의 일과표가 완성됐다. 햄달새의 일정에 따라 나의 기상은 오전 5시 30분 취침은 유동적이지만 대략 밤 11시 전후로 정해졌다. 그 사이 내가 해야 할 주 업무는 운전기사 일과 식사 준비하기 등이었다. 운전은 매일 아침 7시 15분 학교 데려다 주기 오후 2시 45분 학교로 태우러 가기는 고정 코스였고 요일에 따라 과외 할 곳으로 이리저리 데려다 주고 데려 오기가 추가됐다. 식사 준비는 아침과 저녁이 기본이었고 종종 간식도 장만해줘야 했다. 물론 저녁 식사가 끝나고 잠자리기에 들기 전에 한 시간 안팎의 수학 과외는 내 몫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스개 소리로 '총량 불변의 법칙'을 말하곤 한다. 헌데 사교육 천국의 국민 한국인들에게는 과외에도 총량 불변의 법칙이 적용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아이 엄마도 우리 아이들도 한국인치고는 과외를 거의 받지도 시키지도 않은 축에 속한다. 하지만 결국 햄달새를 맡아 기름으로써 나도 과외 세례를 피할 수 없게 됐다. 과외 총량에서 나도 한국인으로서 예외가 아닌 셈이 된 것이다. 과외는 학교가 끝난 뒤 바로 이어지게 시간이 짜였다. 과외 끝나고 집에 들어오면 보통 오후 5시 30분 이쪽 저쪽이었다. 아침 7시가 조금 못돼 일어나는 햄달새로서는 과외 때문에 거의 12시간 만에 집에 들어오게 돼 있는 것이다. 한참 크는 초등학교 5학년짜리인 햄달새는 귀가하면 방 문턱을 넘기 무섭게 배고프다고 노래를 불렀다. 나는 보통은 옷도 갈아 입을 사이 없이 부엌으로 달려가 손만 씻고 곧바로 저녁을 준비했다. 이어진 저녁 식사와 설거지 그리고 학교 숙제 봐주기와 수학 과외를 끝내고 나면 밤 9시가 넘기 일쑤였다. 과외의 실체를 제대로 모르고 살다가 나이 50줄이 다 돼서 그 위력이랄까 쏟아 부어야 하는 에너지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과외에 대해 이전부터 막연하게 거부감이 있었지만 막상 과외를 시켜보니 진정으로 별로 할 짓이 못됐다. 20년 가까이 직장 생활을 했지만 예컨대 회사 일 때문에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류의 생각을 해본 기억이 없다. 하지만 과외는 달랐다. "이게 무슨 짓이냐"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한 달쯤 햄달새를 차에 싣고 이리저리 과외를 뛰어보니까 정말 진이 다 빠졌다. 과외 하기 위해 아이를 키우는지 아이를 키우는 일환으로 과외를 하는지 헷갈렸다. 왜 이렇게 과외에 쫓겨 살아야 하는가. 아무리 머리를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 없었다. 과외에 대한 내 입장은 분명하다. 영어든 수학이든 체육이든 그 어떤 과목이든 성적이 한참 평균 이하여서 도저히 자력으로는 동급생을 따라 잡을 수 없다면 과외를 해도 좋다. 아니면 특정 과목을 너무 좋아해서 학교 수업만으로는 그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도 과외를 할 수 있다. 이들 두 가지 이유를 빼고는 특히 어린 학생들이 과외에 짓눌려야 할 어떤 합리적 이유도 찾아낼 수 없다. 과외를 그 것도 가능한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햄달새의 엄마 그러니까 내 동생이 슬슬 아주 못마땅한 서울 아줌마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2011-04-14

[김창엽 기자의 엄빠일기] "미국까지 와서 과외 꼭 해야해요?"

햄달새가 조기 유학 생활을 시작한 지 대략 한달 쯤 됐을 시점이었다. "삼촌 이 놈의 과외는 미국에서도 꼭 해야 돼?" 하루가 다르게 미국 생활에 재미를 붙여가던 햄달새가 어느 날 과외 하기 싫다고 입을 쭉 내밀며 불만을 토로했다. "삼촌도 힘들어. 왜 과외 해야 하는지는 네 엄마한테 물어봐. 서울에서는 이보다 과외가 훨씬 많았어도 잘만 했다면서." 학교가 파한 뒤 바로 과외 하는 집으로 달려가는 동안 차 안에서 햄달새는 "미국까지 와서도 과외를 해야 하느냐"며 계속 불평을 해댔다. 사람의 심리는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심정이 발동하는 게 정상적일 수도 있다. 과외 지옥 서울을 탈출한 해방감에다 만만해 보이는 미국 학교 공부는 햄달새에게 행복의 원천이었다. 그런 햄달새에게 과외가 눈에 가시처럼 불편한 존재로 인식될 것은 그러니 시간 문제였을 뿐이었다. 긴장의 연속인 생활에서 벗어나 편해지고 보면 과거에는 상대할 만 했던 일들마저도 더 버겁게 느껴질 수 있다. 햄달새에게는 과외는 끔직했던 서울 생활의 기억을 퍼 올리는 갈고리 같은 존재였다. 마음 한 켠에서 이 참에 '폐지'해버리고 싶은 욕구가 꿈틀댄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과외는 사실 햄달새에게 미국 생활의 또 다른 중요한 축이었다. 미국 학교에서 햄달새를 받기로 결정했다는 통지가 오자마자 햄달새 엄마와 나는 '과외 집 짓기'에 착수했다. 햄달새 엄마는 우선 알아봐야 할 과외 리스트를 제시했다. 한국에서 주력 종목이던 영어는 빠졌다. 미국 학교에 다니는 만큼 영어 과외까지는 필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우선 알아봐야 할 과외는 수학과 중국어 바이올린 체육 종목이었다. 수학은 내가 직접 하기로 했다. 따로 돈을 지출하는 것도 아니고 나와 집에서 하는 것이니 햄달새 입장에서는 과외 하는 곳까지 오가는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빼고 매일 1시간씩 가르쳐주기로 했다. 중국어와 바이올린은 서울에서도 한 것으로 햄달새 엄마말로는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초 "미국에 그렇게 오래 있을 것도 아닌데 좀 쉬면 안되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동생의 주장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햄달새는 내 자식이 아니라 동생 자식이므로 결정권은 온전히 엄마에게 있는 것이었다. 과외 과목 결정은 내가 대항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 해야 했던 일은 실력 있는 과외 선생을 가능한 빨리 물색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서울처럼 아파트 정문만 나서면 오만 가지 과외 학원들이 줄지어 선 곳이 아니다. 더구나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과외를 시켜본 경험이 일천했다. 나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미국에서 과외 선생님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전화번호부와 인터넷 검색이었다. 결국 이렇게 해서 전화와 전자우편 인터뷰를 통해 중국어 선생님은 미국으로 이민 온지 얼마 안된 원어민으로 찾아냈다. 바이올린 선생님은 서울에서 좋은 경력을 쌓은 한국 교포 아주머니로 정했다. 체육은 햄달새 엄마는 그리 강조하지 않았지만 내가 강하게 주장해서 테니스를 일주일에 두 번 하기로 했다. 우리 두 아이들이 햄달새 만한 나이에 미국에 와서 한 유일한 과외가 체육이었다. 딸은 1년 가량 춤을 아들은 2년 남짓 테니스를 했다. 영어 수학 혹은 중국어 등과는 달리 미국에서 체육 과외는 종목도 한국보다 다양하고 찾기도 어렵지 않다. 햄달새의 과외 리스트를 작성하면서 동생과 살짝 서로 엇나가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게 두고두고 적잖은 갈등의 시발점이 되리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2011-04-07

[김창엽 기자의 엄빠일기] 일사천리로 진행된 조카의 유학

"백수와 별로 다를 게 없는 시간이 많이 남는 생활인데 네 둘째 내가 봐줄까. 수저 하나만 더 놓으면 될 일 아니겠냐." 2009년 가을 다시 홀아비 미국 생활을 재개하면서 국제전화로 여동생에게 둘째 아이를 보내도 좋다고 말했다. 매사에 억척이고 치맛바람 기질이 다분한 여동생이 기회만 닿으면 '햄달새'를 미국에 조기유학 시키고 싶어하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햄달새는 여동생의 둘째 딸로 내가 지어준 별명이다. 햄스터와 종달새를 결합한 말인데 햄스터처럼 귀엽지만 앙칼지고 또 종달새처럼 쉬지 않고 재잘재잘 떠드는 아이여서 이런 이름을 붙여줬다. 여동생은 내 제안에 "괜찮겠어? 할 수 있겠어?" 이런 식의 인사치레 혹은 확인의 말 한마디도 없었다.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만 6년 넘게 생 홀아비로 두 아이를 미국서 키웠던 오빠의 경력을 아마도 십분 높이 샀던 탓이었을 것이다. 동생은 그 자리에서 조기 유학이 가능한 학교를 서둘러 알아봐달라고 했고 그때부터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10월에 햄달새를 봐줄 수 있다는 말을 건넸는데 11월 추수감사절 때 동생과 햄달새가 미국으로 날아와 내가 찍어준 한 학교에서 전학을 위한 간단한 시험과 교장 선생님 면접 등을 치렀다. 이 학교는 가톨릭 계통이었는데 일일 술술 풀리려고 그랬는지 유학 비자 또한 빨리 나왔다. 가톨릭 학교들이 일반 사립학교에 비해 학비가 싼데다 자금난 때문에 유학생을 잘 받을 것 같아 추천했는데 예상이 들어맞았던 것이다. 서울에서 초등학교 3학년을 마치기 직전이었던 햄달새는 이렇게 해서 만 9살도 채 안된 이듬해 2월 초 본격적으로 미국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늙은 외삼촌 햄달새가 지어준 별명으로 하자면 '할배 삼촌'과 어린 조카의 남들이 보면 기가 찰 수도 있는 또 하나의 가족이 간단하게 구성된 셈이었다. 조카 키우기는 그러나 카드 패로 따지면 조커 같은 것은 전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수저 하나 더 놓는 기분으로 가볍게 생각하고 받았는데 사람이라는 게 한번 '수령'한 이상 거두거나 달리 내칠 수도 없는 하늘이 맺어준 무거운 인연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결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람은 확실히 망각의 동물이다. 홀아비로 아이를 키운 게 처음이라면 모를까 6년 넘게 그 짓을 하고도 "혼자 아이 키우는 게 뭐가 힘드냐"는 식으로 조카 키우기를 자청했으니 말이다. 여자들이 산고를 사실상 까먹는 것도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이라면 비약일까. 죽음과도 같은 모진 산통을 여성들이 두고두고 기억한다면 아마 둘째 셋째는 갖기 어려울 것이다. 한쪽 날개로만 날아야 하는 비행기와 같은 생 홀아비 혹은 생과부 생활은 당사자가 아니면 그 황망함과 공허감을 십분 이해하고 말하기 어렵다. 육체적인 점보다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훨씬 그렇다. 부부의 인연은 확실히 살아있으되 그러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자고 깨어나서도 옆에 남편 혹은 아내가 없는 상황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3~4년씩 지속될 때 형성되는 그 감정은 참으로 미묘하고 당황스럽다. 생과부 생 홀아비 생활은 뭔가 뒤틀려있으면서도 은근히 고통스런 정신적 고문의 나날을 보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뒤늦게 아빠 앞에 불쑥 나타난 늦둥이 마냥 조카의 존재는 잊혀졌던 생 홀아비 생활의 복잡미묘하고 혼돈스러웠던 이런 저런 기억들을 빠르게 되살려냈다.

2011-03-03

[김창엽 기자의 엄빠일기] 홀아비 되니, 과부 심정 알게 돼

바느질 얘기를 한번 더 해야겠다. 고등학교 때 '조침문'이라는 조선시대 가사문학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조침문에서 조는 조의를 표한다는 뜻이고 침은 바늘을 가리키는 것이니 바늘의 죽음을 슬퍼하는 일종의 조사였다. 바늘 허리가 부러져 평소 아끼던 바늘과 이별을 해야 하는 일찍이 남편을 여읜 여인의 가슴 아픈 심정을 절절하게 담았는데 뛰어난 문장력이 한 눈에 돋보였던 글로 기억된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 조침문을 대했을 때 작자에 대한 첫 인상은 지금까지도 온전히 남아있다. 작자가 조선시대가 아닌 오늘날 태어났다면 유수의 문학상 몇 개쯤은 가볍게 휩쓸 날리는 여류 문인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침문이 생 홀아비 생활이 대략 7~8년째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좀 더 콕 집어 말하면 그 여성 작자에 대한 이해의 심도가 한결 깊어졌다. 속되게 표현하면 홀아비로 적지 않은 시절을 지내보니 과부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겠다는 얘기쯤 되겠다. 젊은 시절 남편을 떠나 보내고 청상의 길을 걸어온 조선시대 여인에게 바늘보다 귀중하고 사연이 많은 물건이 있었을까. 긴긴 밤 어두운 불빛 아래 바느질에 열중하다 그 바늘로 허벅지를 찔러야 했을 때가 아마도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손에 바늘이 들려있지 않았을 뿐 나 또한 조침문을 쓴 여인과 감히 비슷한 밤을 적잖게 보냈다고 실토할 수 있다. 꼭 청상이 아니라도 또 조선시대가 아니라도 남편이 곁에 없는 상황을 이겨내야 하는 여인네들이 비일비재할 수 밖에 없는 게 인생사이다.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기러기 가족 엄마들도 대략 이런 부류가 아닐까. 생 홀아비 생활을 한참을 하고서야 역지사지 홀로 사는 여인네의 마음을 읽기 시작한 것은 무엇보다 타고난 둔감 탓이다. 하지만 곁에 엄마가 없는 아이들을 데리고 하루 하루를 투쟁하듯 살아야 했던 초기 미국 생활의 빠듯함도 한 몫을 했다. 도대체 딴 데로 눈을 돌릴래야 돌릴 여유가 일체 없을 만큼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빡빡하게 살아야 했으니까. 생활 여건 탓이든 둔감 때문이든 요즘 들어서야 가끔씩 과거 가까이 지냈던 '생과부 형수' 생각을 하게 된다. 2000년 초반부터 LA 교외의 한 아파트 단지에 같이 살았던 두어 살 아래인 생과부 형수는 고향 선배의 아내였다. 우리 집과 마찬가지로 딸과 아들 자식 둘을 키우는 전업주부였는데 선배는 미국 이주 첫 1년만 같이 식구들과 같이 지내고 곧바로 혼자 서울로 돌아갔다. 우리 집과 형수네 아파트는 타운홈 형식으로 크기와 구조까지 완전히 똑 같은 집이었다. 두 집 사이에 거리는 50미터도 채 안됐다. 그러나 워낙 바빴던 탓에 왕래가 그리 잦을 수는 없었다. 다만 형수네 아이들이나 우리 아이들이 비슷한 또래여서 형수와 나 사이보다는 훨씬 교류가 많았다. 한 달에 한번쯤 두 집 식구가 온전히 모일 기회가 있었는데 십중팔구 형수네가 우리 식구들 초대하는 형식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한 지 4년째인가 되던 어느 날 양쪽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형수가 내게 조용히 그랬다. "이게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뭔지 정말 힘들어 하는 게 역력해 보여 이 말 저 말을 주워담으며 심각하게 위로하는 시늉을 했지만 그때의 형수 심정을 절절히 이해하게 된 것은 자식들 대신 조카를 키우고 살면서부터였다.

2011-02-24

[김창엽 기자의 엄빠일기] 실·바늘만 쥐면 마음 차분해져

기억이 어슴푸레한데 아마 고등학교 1~2학년 때쯤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바느질이란 걸 했었다. 바지호주머니를 꿰맸던 것 같은데 땀을 뜰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이후 군대에서 몇 차례 그리고 신혼 즈음에도 한두 번은 바느질 할이 있었는데 차분해지고 편안한 느낌이 드는 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난 2000년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까지는 곁에 바느질해 줄 누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4대 열 식구가 한집에서 사는 대가족이었으므로 할머니 어머니 혹은 아내나 누이들 가운데 항시 누군가의 손을 빌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 옷 어딘가가 뜯어지거나 구멍이 났다면 그냥 자연스럽게 실과 바늘에 손이 갔다. 바느질 일이 그리 잦지는 않았지만 내 옷이 아닌 식구들 옷을 손봐줘야 했던 것은 미국으로 온 이후부터였다. 한국에서 각각 초등학교 6학년과 4학년이었던 딸과 아들을 미국으로 데려온 뒤부터는 심심치 않게 아이들을 위해 바늘을 잡아야 했다. 아이들의 엄마가 한국에 체류하고 미국에는 같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코 뜰새 없이 바쁘고 항상 시간에 쫓기는 미국생활에서도 간혹 하는 바느질은 여전히 마음을 편안하게 해줬다. 내 바느질은 솜씨라는 말을 갖다 붙이기도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다. 게다가 갖가지 바느질 방법 가운데 할 줄 아는 것이라고야 두세 가지에 불과했다. 그래도 아무튼 실과 바늘만 손에 쥐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뭔가 그윽한 느낌까지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전생이 여자였을까. 흔히 여성들의 전유물로 인식되는 바느질에 거부감이 들기는커녕 바늘만 가까이 하면 마음이 착 가라앉는 스스로를 가끔은 실없이 그렇게 혼자서 생각하곤 했다. 〔〈【운동을 하지 않거나 몸을 움직여주지 않으면 정서불안을 노출하는 경증의 과잉행동장애를 갖고 있음에도 신기하게도 바늘만 만지작거리면 차분해지는걸 어떻게 설명할까.】〉〕 바느질은 내게 감춰져 있던 여성성을 들춰내는 실마리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수시로 한다. 한 때 유행했던 노래 제목도 있지만 남자의 몸을 하고서 '나 홀로 주부'로 8년 넘게 살 줄은 '진정 난 몰랐네'였다. 그 것도 내가 태어난 나라도 아니고 물 건너 다른 나라에 와서 주로 엄마 역할을 하며 살아갈 줄이야. 나 홀로 주부생활 8년 가운데 첫 6년은 싱글 대디였다. 초등학교 때 미국으로 데리고 온 딸과 아들이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홀로 아빠 생활을 했다. 기자 출신으로 말 지어내기 좋아하는 친구는 그때 나를 '엄빠'라 부르곤 했다. '엄마+아빠'의 줄임말이다. 딸 아들 키우는 것으로 싱글 대디의 팔자가 끝났나 했더니 그 것도 아니다. 지난해부터는 초등학생 여자 조카 아이를 한국에서 데려와 키우고 있다. 조카가 한국에서 건너올 때가 막 4학년에 올라갈 때였으므로 10여 년 전 우리 아이들과 엇비슷한 나이다. 우연치고는 재미있다. 그러나 조카는 입양을 한 것도 아니므로 나는 어디까지나 엉클일 뿐이다. 자기 딸을 맡긴 여동생은 오빠를 '엉클맘'이라 부르며 키득거린다. 외숙모는 여전히 한국에 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이번에는 싱글 엉클맘이다. 법적으로는 물론이고 생김새로는 아빠이고 남편이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평소 맡은 일로만 보면 전통적인 관점에서 여성의 몫을 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겉 다르고 속 다른 이런 상황이 그다지 불편한 게 아니고 보면 원래 체질이 여자에 가까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에 평균적으로는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나은 생물이라는 소신도 있고 보니 한편으로는 당당하기까지 하다. 오리지널 여성들보다야 못하겠지만 그래도 남자들 중에서 내가 좀 나은 축의 생물은 아닐까.

201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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